(한국글쓰기연구회 회보 <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2002년 11월호)
이원수 선생의 일제 말기 친일 시, 어떻게 볼 것인가
이오덕
지난 3월 경남대 박태일 교수가, 일제 말기에 나온 ≪반도의 빛≫이란 잡지에 실렸던 이원수 선생의 친일 동시 <지원병을 보내며>를 발견하여 신문에 공개했을 때, 많은 문인들과 선생의 작품을 애독하여 온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실망하였던 것으로 안다. 더구나 같은 어린이문학의 길을 걸어오면서 선생의 그 올곧은 정신을 따르던 사람들로서는 충격이 예사롭지 않았을 것 같다. 내가 잘 알고 있는 한 분은 그 소식을 듣고 곧 전화를 걸어서 "이원수 선생이 그럴 줄 몰랐어요. 더구나 그 친일 동시란 것이 시로서 완성도가 매우 높은 작품이어서 더욱 실망했습니다"고 했고, 또 한 분은 어느 신문에 난 그 기사를 복사해서 나한테 보내 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 복사한 신문기사를 읽고 나 역시 놀랐다. 그리고 참으로 애석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망은 하지 않았다. 선생의 문학과 인간에 대한 내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는 않았다.
내가 놀란 까닭은, 일제 말기에 그토록 뛰어난 저항정신을 나타낸 시를 썼던 분이, 이런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시를 썼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문인들이 일제에 협력하면서 살아가던 그 암흑의 시대에 선생만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지조와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품위를 끝까지 잃지 않았던 분이라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선생마저 그 절망의 시대에 우리 민족 앞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드러났으니 이보다 애석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선생도 전과자였던 것이다.
그 지원병 격려시가 1942년 8월에 발표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그 무렵에 선생이 살았던 자취를 살펴보면, 1935년(25세 때)에는 반일문학 그룹 독서회 사건으로 치안유지법에 걸려 1년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이듬해 감옥에서 풀려 나와 최순애 씨와 결혼하게 된다. 1937년에는 함안금융조합에 복직을 한다. 그래서 친일 시를 쓴 1942년에는 장남이 6세, 차남이 4세, 장녀가 2세로, 자녀 셋을 거느린 가장으로 되었다. 이래서 식량난이 극심했던 그 무렵에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겠나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그 무렵 시국을 보면,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그래서 1942년 2월에는 일본군이 싱가폴을 점령하게 되어 한때 남양 일대를 일본군이 휩쓸어 온 세상이 일본제국으로 될 판세같이 돌아갔던 것이다. 조선의 모든 문인들이 동원되어 '대동아공영권'을 만들려고 한 일본제국에 협력하게 된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 때 이원수 선생도 그만 이 땅이 영원히 일본제국으로 되고 말 것으로 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그 무렵의 사회 정세나 선생의 가정 형편을 살펴보는 까닭은, 선생의 친일 행위를 조금이라도 변호하고 싶어서 그 정상을 참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가 결단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때 그런 글을 쓰게 되었던 선생의 심정과 사회 배경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아무리 먹고살기가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더구나 직장에 취직을 하는 조건으로 친일 시를 써서 사상이 바뀌었다는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했더라도, 또 그 무렵 모든 문인들이 전쟁에 협력하는 글을 써서 살아가는 풍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민족을 배반하는 시를 썼다는 것은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여기서 굳이 선생의 친일 행위를 변호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 시를 쓴 때가 선생의 나이 32세이던 해였다. 그러니까 아직은 너무 젊은 나이로, 말하자면 철이 좀 덜 든 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철이 덜 든 사람이라고 선생을 변호하고 싶지도 않다. 20세 전후였다면 모르지만, 30을 넘었다면 누구든지 그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나이다. 더구나 선생의 경우는 25세 때에 벌써 일본제국의 질서에 반항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하여 감옥살이까지 한 분이 아닌가.
아무튼 선생의 친일 시는 우리 민족 앞에서 크나큰 죄를 지은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깝고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 더 실망하지는 않는다. 이원수 선생이 쌓아 놓은 문학의 업적이, 선생의 그 전과로 하여 무너진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선생의 문학을, 우리 겨레 어린이문학을 떠받치는 가장 든든한 기둥으로 되어 있다고 보고, 또한 선생의 사람됨을, 이 세상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맑고 바르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분으로 언제나 가까이 하여 왔던 지난 모든 날들을 결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내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가? 그것은, 우선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믿고 사귀면서 존경하고 마음을 나누어 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몰랐던 그 옛날에 그가 어떤 죄를 저질렀던 사람이란 사실이 드러났다고 해서 그에 대한 믿음이나 존경심이 사라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배척해야 할 까닭이 없다고 보는 것이고, 또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이 있을까?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누구나 죄를 짓는다. 다만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서 그 잘못을 예사로 여겨 그것을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고, 그런 사람을 용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하였던 일을 평가할 때는 단순히 그가 어떤 잘못된 일을 하였는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것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죄악을 어느 때에 저질렀는가, 젊었을 때인가, 나이가 더 많아서 그 생각이나 하는 일이 무르익었다고 해야 할 나이에 그렇게 하였던 것인가? 그리고 젊어서 그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뒤로는 그 잘못을 뉘우치고 아주 깨끗하고 바른 길을 가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고 여전히 잘못된 삶을 이어 갔는가, 하는 관점으로 그 값을 매겨야 옳다.
그렇다면 이원수 선생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일제시대부터 6·25 남북 전쟁 무렵까지 선생이 하여 온 일에 대해서는 작품과 책으로 알 뿐이다. 그런데 1953년부터는 편지로, 전화로, 만나서 주고받는 말로, 함께 한 여행이나 그 밖의 일로 선생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대하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생만큼 불의와 부정을 싫어하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만난 적이 없다. 작품으로도 그렇다. 4·19 때 독재자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화로 쓰고 동시로 쓴 사람은 이원수 선생뿐이었다. 전태일 청년이 스스로 몸을 불태운 사건을 동화로 쓴 사람도 이원수 선생뿐이었다. 남북 분단의 비극과 통일을 애타게 바라는 우리 겨레의 슬프고 애끓는 바람을, 선생은 여러 동화작품에서 훌륭하게 그려 보였다. 이래서 선생의 문학은 우리 겨레 어린이문학의 가장 올바른 줄기를 잇고 그것을 튼튼하게 지탱해 주는 기둥으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이다.
선생은 이처럼 올곧게 살았고, 우리 어린이문학에서 그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의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는데도 세상살이에서는 언제나 푸대접을 받았다. 권력과 손잡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공만을 이념으로 하는 군사독재 폭력 정권에 붙어서 그 반민주 정치를 추종하고 찬양한 모든 문인들에게 따돌려져서 음으로 양으로 냉대를 받는 처지로도 되었으니, 이에 따라서 물질 생활면에서도 여간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가는 길과 아주 어긋난 사람의 손을 잡은 일이 없었다. 마지막에 죽음과 싸우는 끔찍한 병을 앓으면서도 광주 사건을 소식으로 듣고 분노했던 것이다.
이렇게 살았던 태도로 미루어 선생은 일제 말기에 한때 저질렀던 그 친일 행적을 뼈아프게 뉘우쳤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선생은 그 부끄러운 친일 동시를 썼던 몇 해 동안의 죄를 갚기 위해 그 뒤로 그 몇 해란 세월의 꼭 10배나 되는 동안을 (한평생을) 우리 어린이와 겨레를 살리기 위한 작품을 써서 남기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째서 선생은 생전에 떳떳하게 그런 말을 하지 못했을까? "내가 그 때 친일 동시를 썼다. 참으로 큰 죄를 지었다. 이제부터 그 죄를 갚기 위해 남은 삶을 바치겠다" 하고 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것이 또 아쉬운 대목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도 나는 선생의 처지와 말못할 그 심경을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그 때 만약 그런 고백 같은 것을 하였더라면 어찌 되었겠는가? 선생을 적대시하여 기회만 있으면 몰아붙이려고 하던 사람들이 좋은 재료가 생겼다고 선생을 크게 비난하고 비판하기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불행한 이 땅의 아이들에게 주는 글을 쓰는 일이, 선생으로서는 더한층 어렵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5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그 독재 암흑의 시대에는 우리 문단과 언론계와 학계에서 일제시대의 부역 문제를 참되게 성찰하고 논의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시대에 아무리 자기 고백이라지만 일제시대에 친일 동시를 썼다고 하는 뚱딴지같은 고백을 한다는 것은 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선생이 생전에 고백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된다.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사회 활동을 하였던 사람들이 일본제국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던가를 생각할 때 그런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세 등급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친일 행위를 조금도 하지 않은 사람이고, 둘째는 친일을 하였으나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최소한도로 한 사람이고, 셋째는 일본제국에 아주 적극 나서서 협력한 사람이다.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눈 가운데서 둘째와 셋째는 사람에 따라 그 어느 쪽인가를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또 이렇게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행적을 두고 그 등급을 분류한다고 하더라도, 단지 이것만으로 그 사람들의 삶을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이, 일제가 이 땅에서 물러간 뒤로 그런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돌아보게 되고,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마땅히 이어지는 문제로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친일 행위를 조금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사람이 반드시 아주 훌륭한 사람인가, 하는 물음도 나와야 한다. 예를 들면 일제시대에 우리 땅을 떠나 미국이나 그 밖에 서양의 어느 나라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학문이란 것을 하면서 무사히 편안하게 지낸 사람이라면 친일이고 뭐고 하는 짓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해방 직후에 돌아와 많은 국민들이 부러워하는 무슨 유명 대학을 나오고 무슨 박사 학위를 딴 것을 자랑삼아 정계나 재계, 학계, 교육계에 진출해서 명예와 권력과 부를 누린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제시대에 잠시 친일 행위를 하였지만 그 뒤로 뉘우쳐서 독재 정권에도 맞서 싸우면서 올바르게만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친일은 하지 않았지만 독재정권을 세우는 데 앞장서거나 그 정권에 아부해서 남북의 분단과 민족의 분열을 더욱 부추기고 심각하게 하는 노릇을 하여 온 사람과는 도무지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삶을 보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좋지 못한 사람은, 일제시대에 친일 부역을 하였는데도 해방 뒤로 그런 과거를 온갖 말재주로 변명하는 사람들이고, 또 그런 변명을 하면서 다시 역대 군사독재 정권에 빌붙어, 사람들이 쳐다보는 높은 자리를 죽을 때까지 잘도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렇게 일제시대의 친일 행위를 온갖 말재주 글재주로 변명한 사람일수록 그 일제시대의 친일 행위가 적극으로 나서서 하였던 참으로 추악한 범죄 행위였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정말 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은 아직도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그런 추악한 짓을 스스로 변명하면서 여전히 또 그런 더러운 짓을 끊임없이 하여온 사람들이, 죽고 나서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떠받들여지고 있는 일이다. 정계는 물론이고, 문단과 예술계가 바로 지금 이렇게 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일본제국이 남겨 놓은 그 어처구니없는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친일 반민족의 무리들과 그 후예들이 정치고 경제고 언론이고 교육이고 문화 예술계고 온갖 자리에서 버티고 앉아 그 권세와 부를 누리면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친일 반역 문제는 1945년 8월 15일을 경계로 하여 그 이전으로 지나가 버린 역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이어온 문제고, 지금도 이어지고 진행되고 있는 문제다. 친미가 친일과 다를 수 없고, 반민족 군사독재가 언제나 친일 세력을 주축으로 하여 이뤄졌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분단시대를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지 않고 일제시대의 행적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태도가 얼마나 좁은 눈길로 역사와 사람을 보는 것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 겨레가 지금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참된 민주 사회를 세우는 일과 평화 통일을 이룩하는 일이다. 이 과제는 반세기도 더 지난 그 때부터 한결같이 이어온 우리들의 피맺힌 소원이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에 영향을 끼친 사람을 평가하는 일에서도 이 민족 지상의 과제를 어떻게 풀 수 있는가를 생각해서 지난날의 역사를 돌아보고 그 역사 속의 사람들을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그 사람들이 저마다 이 과제 해결에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가, 또는 방해가 되고 해독을 끼쳤는가 하고 말이다. 이원수 선생의 행적과 친일 동시 문제도 마땅히 이런 관점에서 판단하고 비판하여야 하겠다.
듣자니, 박태일 교수는 지난 3월에 발표한 그 '지원병을 보내며'란 동시에 이어 이원수 선생의 또 다른 여러 편의 친일 동시가 있다면서 그것을 발표한다고 한다. 왜 한꺼번에 발표하지 않고 이렇게 한 편만 내놓고는, 7개월이 지난 지금도 나머지를 발표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동화작가 ㅇ씨는 내가 쓰는 이 글을 지금 쓰지 말고, 박 교수가 나머지 작품을 다 발표하고 나서 쓰라고 충고해 왔다. 그런 충고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 누구의 간청으로 마지못해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확고한 신념으로 쓰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원수 선생을, 분단시대의 이 나라 어린이문학을 가장 올바른 길로 열어 주고 이끌어 준 분으로 믿어 왔는데, 이 믿음은 앞으로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이제 창원에서 뜻있는 분들이 선생의 문학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벌이려고 한다니 참으로 반갑다. 그 사업의 하나로 기념관인가 도서관을 세운다고 하고, 그런 건물 어느 층에 선생이 남긴 모든 작품을 모아서 보존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보존하는 그 자리에는 선생의 빛나는 모든 작품뿐 아니라 일제 마지막에 썼다는 그 친일 동시까지도 있는 그대로 죄다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더 큰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선생도 저승에서, 생전에 스스로 깨끗이 보여 주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하여 준 일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작품을 읽게 되는 우리 아이들까지도, 세상의 어른들이 하는 모든 일을 더 깊게 더 넓게 생각하게 되고, 더 참되게 깨닫고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무결한 성인군자처럼 살아간 위인에게서보다도 결함이 있었던 사람, 자기와 비슷한 점이 있었던 사람한테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듯이, 나도 한때 잘못했지만 그것을 뉘우치고 바르게 살면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구나 하고 자신감을 가지게도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원수 선생은 우리 겨레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정한 분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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