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통 새 동화가 나오면 먼저 작가를 보고 그 동화에 대한 마음의 평가를 하게 된다. 그만큼 작가가 보고 살아가는 이야기, 세상 이야기 따위를 작품 속에 넣을 때 어떤 세계관(인생관, 역사관)을 가지고 썼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훌륭한 동화는 작가의 바른 인격과 삶과 인생관이 얘기 속에 감동으로 느껴질 때 나오는 것'(이오덕,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라 했다. 이금이 동화는 그가 농촌에 살면서 보고, 느끼고, 겪은 일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가 현재 농촌에 살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농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는 작가 이금이는 농촌을, 농민들의 삶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농촌은 도시와 역사와 사회와 독립해 있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현대의 산업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농촌, 그 안에서 생기는 많은 역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작가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살펴보겠다.
《가슴에서 자라는 나무》는 87년 계몽사 아동문학상을 받은 장편동화이다. 이 동화는 5학년인 '은지'가 안터말로 이사오면서 겪는 이야기다. 서울에서 살다 시골(안터말)로 이사를 와서 만난 친구들과 순혜 할머니, 그리고 교장 할아버지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여기서는 '순혜 할머니의 생각'(발단)과 '교장 할아버지의 등장'(전개)이라는 줄거리의 큰 줄기를 통해서 작가가 농촌을, 농부들의 삶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만 생각해 보기로 한다.
순혜네 증조 할머니는 마을의 지주였던 윤 씨댁에 종이었다. 증조 할아버지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난 것은 그저 윤 씨댁 지순 어른의 은혜 때문이다. 그리고 3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순혜 할머니의 다짐은 절대적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주와 종은 대립의 관계이다. 그 두 계급은 은혜를 입고 도움을 받는 상부상조의 관계는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순혜네 증조 할아버지처럼 지주를 '종살이를 풀어 준 은혜로운 분'으로 집안 대대로 감사하며 살았다면 아마도 순혜네 증조 할아버지는 같은 종들을 등지고 지주편에서 산 비열한 사람이거나 자기도 한 인간임을 포기한 종속적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올바른 역사관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많은 민중들의 저항과 주체적 싸움을 통해 그리고 객관적 사회 구조의 변화 따위들은 지주가 종들을 풀어줄 수 밖에 없게 했다. 그것은 지주들의 은혜가 아니라 종속된 인간이 독립되어 주권을 찾는 역사의 산물이다.
문제는 순혜 할머니의 이 그릇된 생각(이것은 곧 작가의 생각이기도 하겠지만)이 그 혼자만의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지금이 뭐, 그 집 종 노릇하던 옛날인 줄 알아?"(46쪽) 라고 순혜가 한마디 하는 것 뿐, 반론은커녕 순혜 할머니의 생각과 말은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진실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윤씨 댁 지순 어른의 은혜는 그 아들 덕진 서방님(교장 할아버지)이 30년만에 다시 안터말로 돌아오면서 잔치를 베풀고, 여름 글방을 베풀고, 순보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오랫동안 그 땅을 지키고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간데 없고 사회적 명예와 부를 그대로 간직한 채 30년만에 돌아온 교장 할아버지가 '베푸는 은혜'가 중심이 된다. 마을 사람들이나 아이들은 교장 할아버지가 '고향을 위해서 일하도록' 기꺼이 앞장 서 준다. 무엇 때문에? '옛날엔 마을 앞에 펼쳐진 너른 은뜰이 모두 그집 것(40쪽)'이었고, 30년 동안 너른 기와집을 비워둔 채 다른 곳에 가서도 먹고 살 수 있는 집이 '윤 씨댁'이다. 아마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 중에는 윤 씨댁 땅을 부쳐 먹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 땅의 농민이다. 소작에, 인간적 모멸감에, 수매에, 수시로 시달리는 소 파동, 돼지 파동, 배추 파동, 고추 파동……파동, 파동에, 아이들 교육에 시름젖고 주름살 패이게 사는 우리 농민들이다. 땅 한 뙈기 없어 일년 내내 고생하여 지은 농사가 땅 주인(지주) 뱃 속으로 채워지는 한(恨)을 속으로 삭히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 한(恨)은 간 데 없고, 오늘날까지도 은혜로 이어진다. 마침내 교장 할아버지는 물질적 지주는 물론 정신적 지주까지 되어 농민들을, 아이들을 지도하는 만능의 고마우신 '어르신'이 된다. 작가의 이러한 세계관은 지금의 농촌(농민)을 보는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주나 지식인이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게 하는 지식인의 관념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발표된 《맨발의 아이들》은 작가가 농촌에 살면서 겪고, 느낀 일들을 밑바탕으로 쓴 이야기들이다. 여기 실린 동화들은 대부분 농촌의 현실과 아이들의 삶이 꾸밈없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꾸밈 없이 진솔하게'라고 한 것은 작가가 겪고, 느끼고 쓴 글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보여진 진실은 무엇일까? 작품을 가지고 얘기해 보자.
<저 분꽃을 보렴>에서는 농촌 활동을 온 대학생과 상희 아버지를 통해서 지식인과 농민을 보는 작가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니들이 뭘 안다고 시골엘 왔어? 농촌 문제가 어떻다구? 그래도 나중에 시골로 시집 오겠다는 놈들은 하나도 없을 걸"(80쪽)
"한 열흘 여기 와서 일손 돕네, 설치지 말고 평소에 밥상에 오르는 쌀 한 톨 소중한 줄 알고 수입 농산물 먹지 말고……일손 남아도는 농촌으로 만들어 보란 말여……"(81쪽)
상희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 농촌 활동 온 대학생들에게 한 말이다. 상희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고 대학생 언니에게 창피하여 학생반 모임에도 못 간다. 어디 한 군데 틀린 곳 없는 이 말이 당당하게 이 땅에 사는 농민의 말이 되지 못하고, 그저 술주정뱅이의 주정이 되고 그것을 딸은 부끄러워 한다. 또 상희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고, 소풍을 가서도 척척박사가 되어 꽃 이름도 알려주고, 아버지가 아는 것 많고 자존심 강한 이 땅의 농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도 모든 문제의 해결사요 지도자인 대학생 즉, 지식인인 것이다. 끝내 아버지의 진실은 술주정으로 묻혀 버리고, 대학생이 아이들에게 베풀고 감동 받고 기뻐하는 아이들만 있다. 못 배웠어도 자랑스러운 아버지는 없고, 고상한 대학생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만 있을 뿐이다. 작가 이금이는 지식인에 의존하고 그들이 만능이 되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고리를 여기서도 아직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임길택의 <느릅골 아이들>에도 대학생이 농촌 활동을 간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견주어 보자. '대숲이 예쁘다'는 대학생 언니를 보고 '뱀이 나오는 대숲을 왜 좋아하지?'라고 생각하는 서진이, '한 가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라 말하는 당당한 아버지, 논둑에 앉아 피와 벼가 어떻게 다른가 배우는 대학생들, 이들이 주고 받는 말에서 우리는 작가가 말하고 싶은 진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작가의 정신이요, 세계관인 것이다.
이금이 동화는 그가 시골에 살면서 쓴 글이다. 글이 어렵지도 않고 단숨에 읽혀지는 재미도 있고 아픔도 있고 풋풋한 정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가슴으로 자라는 나무》에 견주어 《맨발의 아이들》의 문체나 내용(주제)에서 농촌현실을 사실적으로 쓰고 있다. 작가가 농촌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농촌 현실을 어떻게, 어떤 세계관을 갖고 글을 쓰는가는 작가의 몫이다. 작가가 이 역할을 올바르게 할 때 아이들에게 농촌은 희망일 수도, 버려질 수도 있다. <함께 가는 길>에서 '쌀은 우리의 생명'이라고 쓴 머리띠를 민규에게 동여매 주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당당함은 힘든 농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어 한숨만 쉬며사는 아버지와는 다르다. 누가 만들어 주는 해결(삶의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고난을 극복하고 참주인이 되어 더불어 함께 사는 삶, 작가 이금이가 농촌에 거는 희망이 그것이라면 이 땅의 아버지(농민)들이 한숨짓고 - <귀뚜라미 우는 밤>, 현실을 외면하고 - <아카시아 향기>, 술주정뱅이 - <저 분꽃을 보렴>가 되는 현실이 진실이 되어야 한다. 그 진실은 작가의 올바른 세계관, 역사관 속에 있다. 지금까지 그가 농촌 현실을 보고, 겪고, 느낀 것을 있는 사실 그대로 썼다면 이제는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 작가의 정신이 들어있어야 한다. 떠난 사람이 언제고 찾아올 수 있도록 남기로 한 아버지 - <아버지의 들>, 그 아버지는 현실의 아픔과 답답함을 기다림으로 해결한다. 농촌은 안식처, 마음의 고향이라는 그 허상 속에서 언제까지 그렇게 기다리며 살아야 할까? 이런 생각은 현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작가가 지금까지 보여준 의존하려는 자세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작가 이금이에게 거는 희망은 <함께 가는 길>에서 보여준 의지와 감동이 곧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문화를 누리는 지혜 > 작가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08.12.14/ 지식채널e - 정생 (0) | 2009.09.03 |
---|---|
지식채널E-정생 (0) | 2009.07.20 |
이원수 선생의 일제 말기 친일 시, 어떻게 볼 것인가 (0) | 2009.03.08 |